절두산 성지를 가다
1740년,
지금의 양화대교 주변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입니다.
왼쪽 그림은 양화진, 지금의 절두산 성지가 있는 잠두봉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그 맞은 편에 있었던 선유도(仙遊島),
신선들이 놀던 섬이라는 뜻이죠.
1424년,
효령대군은 이 두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별장으로 사용할 정자를 하나 지었습니다.
마침 세종대왕이 이곳을 방문하던 날,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기에
세종은 이 정자에 '희우정(僖雨亭)'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해 보였죠.
훗날 월산대군은 이 곳의 이름을 '먼 곳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원정(望遠亭)'으로 바꿉니다.
오늘날 망원동의 유래가 됐죠.
정선은 선유도와 잠두봉이 보이는 망원정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이 정선의 '양화환도(楊花喚渡)', 즉 양화나루에서
'강을 건너려고(渡) 배를 부르는(喚)'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모래톱이 보이지만, 과거 자료를 보면
이곳에는 하얀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수심이 낮아지면 걸어서도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해요.
망원정 아래쪽으로 '모래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북한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
아름다운 모래가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 '모래내'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모래내 건너편의 지명이
'수색(水色; 물빛)'인 것도 이곳의 하얀 모래사장과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빗어낸 이름일거라는 생각입니다.
* * *
1866년, 평화롭던 이곳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죽인 것을 계기로 프랑스함대 로즈 사령관은
군함 7척에 천 여명의 병력을 태우고 강화도를 점령합니다.
강화의 외규장각에서 조선 왕실의 중요 문서를 약탈해 가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리는 만행도 저지르죠.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프랑스군이 후퇴하자
흥선대원군의 복수전이 펼져집니다.
천주교도의 씨를 말리겠다며 전국적으로 1만 여명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참수를 거행했지요.
원래 천주교도들의 사형장은 새남터였습니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도 백 여명을 새남터에서 참수했죠.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 침략에 앞서 이곳 잠두봉 아래까지
배를 끌고와 지형을 정찰하고 돌아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그 침략의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 위해
잠두봉 아래 모래사장을 처형 장소로 정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중학교 때 본 영화를 통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고증을 거쳐 만든 영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제목도, 스토리도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고,
오로지 참수하는 장면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선채로 몸은 모래 속에 파뭍히고,
모래 위로 머리만 나와 있습니다.
술에 취한 망나니가 그들 사이로 춤을 추며 돌아다니다가,
크게 칼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머리가 하나씩
굴러 떨어지는 참혹한 모습... 이렇게 잠두봉에서 희생된
천주교도가 2천명 가량이 되었다고 하니,
이곳의 지명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머리를 자른 산'이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뀝니다.
공식 명칭은 잠두봉이었지만, 사람들이 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하니 절두산이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966년,
이 자리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이 세워집니다.
절두산 정상 위에 우뚝 선 순교 기념관과 조그만 성당,
둥근 지붕은 천주교도들의 갓을, 하늘을 향한 종탑은
신자들의 목을 벤 칼을 상징합니다.
영화에서 본 참수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입니다.
정상에 있으면서도 그 규모가 절두산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소박한 모습이지만 품위가 느껴지죠.
부드러운 곡선과 굵은 선이 만들어 낸 무게감이
침묵을 유도합니다.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설교하지 않아도
저절로 숙연해지도록 만드는 공간의 힘.
수없이 많은 차량이 분주히 오가는 강변북로지만,
절두산 아래 강변 산책로는 고요합니다.
150년 전 처형장이었을 그 자리에
"영혼의 강"이라는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한강아,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터, 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그곳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면
순교자 기념탑이 보입니다.
주탑에 새겨진 16명의 성인과 무명의 순교자들,
이름조차 없어 간난이, 업이, 큰아기로 불렸던 사람들,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사람들은
평화롭고 순박한 모습으로 다시 그 자리에 섰습니다.
갓과 패랭이를 쓰고,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가지런한 모습이 마치 미륵을 보는 듯 합니다.
한 눈에 봐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듯한 정원에는
요한 바오로 2세, 남종상 세레요한 등의 흉상과
다양한 기념비들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과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도 있습니다. 척화비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순교기념 박물관에서는 운이 좋게도
고(故) 탁희성 화백의 '복자열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복자가 된 윤지충, 정약종, 주문모, 유항검 등
순교자들의 삶이나 행적, 순교 장면을 그린 그림이지요.
도슨트가 있어 그림 하나하나를 설명해 줍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네요.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사진에서는 왼쪽),
노랗게 물든 느티나무 아래 건물이 형구, 형틀 체험장입니다.
리델 주교가 쓴 <옥중기>를 토대로 재현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자유로운 곳입니다.
주릿대, 십자형틀, 곤, 추(나무수갑), 차고 등이 있어
옥에 같혀 보고, 목 칼을 차보고, 곤장도 맞아보고...
모든 형벌을 다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옥에 갖히는 건 그렇다 치고, 얼마나 아픈지 곤장을
맞아보기까지 하다니... 참 희안한 아들입니다.
* * *
절두산 성지는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기회가 생기겠지 하고 미뤄왔던 곳.
차를 이용하기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도 애매한 곳을
자전거를 이용해 다녀왔죠.
연신내 → 송추 → 의정부 → 포천의 정체구간이 싫어
가지 않았던 광릉 국립수목원도 한강에서 중량천을 지나는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니 가능하더군요.
아들과 자전거로 전국을 다 다녀보자는 계획을 세우며,
동해안은 어떻게 할까를 .... 고민했습니다.
이 계획이 어디서 누설이 됐는지 고성에서 부산까지
동해안 자전거 도로가 2016년에 완공된다고 하네요.
무서운 나라입니다. ^^
카톡도 유출되고,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도 유출되고,
우리가 세운 계획도 유출되고... ㅎ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