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이 고통을 꼭 돌려드릴 겁니다."
"아버지께 용기를 내어 말해야겠어요.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나에게 얼마나 고통을 줬는지,
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고통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발할 때 흔히 동원되는 단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폭력과 고통을 혼동한다.
달리말하자면 원인과 결과, 기원과 효과를 혼동한다.
사실 고통을 돌려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통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낳거나 고통을 품고 지내는 것은 우리뿐이다.
비록 외부에서 오는 폭력에 상처를 받아서 고통이
발생했을지라도 어쨌든 자기 안의 고통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상처되는 말이나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게 곧이곧대로 우리 상처의 원인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사실이 시간적으로 연속되어 있다고 해서
사실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언행이 상처가 되는 이유는 엄밀히 따져서
그 언행이 우리 내면의 멍든 곳,
이미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아주 오래전에 생긴 상처를 헤집거나
도지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못 참겠는 거다.
사실, 고통은 어떤 근원적인 상처를 만들거나,
가져오거나 다시 후벼파기 때문에 생긴다.
사람이 약해져 있을 때 예민한 기색이 보이는 국면에서는
어떤 몸짓, 행동, 말에서 입는 충격이 굉장히 폭력적이 되고,
그 일 자체는 별 것 아닌데도 매우 오래가는 상처를 만든다.
이런 경우 폭력을 가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문제다.
우리가 갓난아기 때부터 어린시절을 보내는 동안 입는 원상처는
사실 폭력적인 의도가 없는 행동, 심지어 저쪽에서는
기억도 못할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에서 올 때가 많다.
이따금 부모들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내뱉은 말이나 행동에
자신이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서
충격을 받거나 어리둥절해 한다.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은 온전히 부모의 행위, 결정,
행동방식과 직접적인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진다.
아이는 부모의 행위, 결정, 행동방식을 자신에 대한 제약이나
좌절, 심하게는 위협이나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는 반대로 자기에게 해주는 좋은 일, 자기 욕구의 충족으로
간주함으로써 더 많은 자율성, 자유, 기쁨, 사랑으로 나아가고
삶의 행복을 재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발상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타자를 문제 삼고, 비난하고, 죄를 묻는다.
요컨데, 자기 감정에서 출발하여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어떻게든 타자에게 고통의 책임을 돌리고야 마는 것이다.
피해자 노릇을 하면서 상대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쾌감이
때때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이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거나
무슨 공로를 세운 것같은 기분을 안겨 주기도 한다.
하지만 책임을 분명히 하고 통찰력을 발휘함으로써
고통을 빨리 훌훌 털어내고 회한, 씁쓸함, 앙심을 놓아버리고 싶다면
남 탓을 해 봤자 도움이 안 된다. 끊임 없이 생각을 곱씹고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것도 자기파괴적인 행동 밖에 안 된다.
...(중략)...
용서를 둘러싼 신화가 있다.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줄게."
관대한 비판자로 변신한 피해자는 간수 혹은 죄인에게
그가 지은 죄를 확인해 주는 그럴싸한 역할을 떠맏는다.
이 때 피해자는 그래도 자기가 입은 폭력을 '간직하고' 있음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폭력의 흔적과 후유증이 남아 있음을 잠시 잊는다.
용서의 즉각적인 효과란 상처의 염증이나 가려움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고를 바르고 습포를 덮어놓는 것과 비슷하다.
타자를 용서할 때에는 기분이 다소 가벼워지고 안도감이 든다.
마음 속의 원망이 많이 가라앉고 차분해지며
자꾸만 반복되던 생각도 조금 덜하게 된다.
우리를 상처 입힌 그 사람과의 관계도 많이 진정된다.
그렇지만 내가 입은 폭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용서를 통해 폭력이 사라지는 것 같고 상처도 아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폭력은 고스란히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리고 숨어 있을 뿐이요, 상처도 그렇게 많이 아물지는 않는다.
게다가 상처는 사소한 사건에도 금세 도질 것이다.
사실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법이다.
우리의 행동방식으로, 때로는 수십년 동안이나 공고하게
유지해온 그 모든 자기 폭력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술마시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20년 동안이나
키워왔던 그 어린 소년을 용서합니다."
"그토록 많은 날을, 그토록 많은 밤을, 열다섯 살 때 받았던
모욕을 곱씹느라 망쳐버렸던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
<자신으로 존재하는 용기>
자크 살로메 저 | 마디
